어제 저녁 이른 퇴근을 하고 집에 가는 길.
마트에서 장을 봤는지 한 젊은 여성이
거대한 비닐 봉투에 잔뜩 담긴 식료품들을 들고
낑낑대다가 헉헉대다가 아휴 아휴 이러다가
멈춰서서 굴러떨어진 바나나를 다시 주워담다가
다시 에잇 에잇 이러면서 언덕 위로 걸어가고 있었다.
한 눈에 봐도 봉투가 여성에게 너무 크고 무거워서
한 손으로 들지 못하고 손잡이 하나에 한 손씩
두 손으로 낑낑대며 올라가고 있었다.
솔직한 말로,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럴 때면 차라리 초등학생으로 되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그때는 충동과 행동 사이의 간격이 짧아서
도와줘야겠다는 충동이 생기면
그 충동을 잠재워 누르는 다른 잡다한 생각들이
부유하기 전에 행동으로 옮겨지고는 했다.
적어도 연탄이 가득 실린 리어카를 뒤에서 민다거나
할머니 짐을 들어드린다거나 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그녀의 무겁고 더디며 열 걸음 후 한 번 쉬는 행복에 따라
자연히 내 걸음은 그녀를 추월하게 되었고
나는 혹시라도 도와 달라고 하지 않을까 싶어서
일부러 천천히 천천히 앞에서 걸었는데
그러면서도 몇 번이나 뒤돌아 보고 또 뒤돌아보고 그랬는데
혹시라도 봉지가 뜯어져서 쏟아지면
그땐 잽싸게 되돌아가 도와줘야지 라는 생각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언덕 아래서부터 언덕 맨 꼭대기까지
무려 약 7분 가량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눈에 거슬리게 앞에서 어슬렁거린 셈이 되었다.
저기... 도와 드릴까요...
라는 말 한 마디를 난 왜 못했을까 왜 못했을까.
하다못해 영어로라도 메이 아이 헬프 유
왜 못했을까 왜 못했을까 와이 못했을까.
아마도 거절 당하는 게 싫었던 것 같다.
특히나, 뭐가 됐건, 어떤 사유건 간에
여자에게 거절 당하는 건 기분 나쁘니까.
또 하나는 더이상 뭔가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게 싫은 거다.
도와 드릴까요?
정말요? 너무 감사해요.
헉헉헉!
힘드시죠?
천만에요, 이런 일 있으시면 언제라도 불러주세요.
이 동네 사시나 봐요?
이사 온지 14일 됐답니다 하하하.
어머, 저도 혼자 사는데...
그럼 우리 동네 친구하죠...
와, 좋죠! 제 친구도 소개해 드릴게요...
대충 이런 시나리오가 단박에 떠올랐는데
대충 그렇게 진행될리가 없는 것을 '현실'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게 일부러 주춤거리며 더디게 올라가
원룸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원룸 건물에 들어가
그 여자가 낑낑대며 지나가는 모습을 20여초 가량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가 바로 이 원룸으로 다가왔다.
알고보니 이 원룸 건물 2층 사는 사람이었다.
건물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뭐라도 말을 걸어야겠다 라고 마음 먹고
가급적 자연스런 미소를 준비하고 있을 때
그녀는 내 앞을 차갑게 지나쳐서
2층까지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얼마나 힘든지
내가 탄 엘리베이터가 2층을 지나칠 때
엘리베이터 바깥 복도에서 헉헉 대는 소리가 안까지 들려왔다.
뭔가 대단하고 어려운 일 하기도 어려운 판에
이렇게 별로 어렵지 않은 일
누군가의 무거운 짐을 들어준다거나
사소하게 팔랑거리는 인삿말 하나 건네는 것조차
이렇게 어려워서야 어떻게 살아가란 말이냐
라고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는데
결국 이 물음은 나 자신에게 할 수박에 없는 물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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