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 정호승, 창비, 2011(초판3쇄)
봄비
어느날
썩은 내 가슴을
조금 파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두었다
밥값
어머니
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아침에 출근하듯이 갔다가
저녁에 퇴근하듯이 다녀오겠습니다
식사 거르지 마시고 꼭꼭 씹어서 잡수시고
외출하실 때는 가스불 꼭 잠그시고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
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
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설해목
천년 바람 사이로
고요히
폭설이 내릴 때
내가 폭설을 너무 힘껏 껴안아
내 팔이 뚝뚝 부러졌을 뿐
부러져도 그대로 아름다울 뿐
아직
단 한번도 폭설에게
상처받은 적 없다
꽃
사람은 꽃을 꺾어도
꽃은 사람을 꺾지 않는다
사람은 꽃을 버려도
꽃은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영정 속으로 사람이 기어들어가
울고 있어도
꽃은 손수건을 꺼내
밤새도록
장례식장 영정의 눈물을 닦아준다
충분한 불행
나는 이미 충분히 불행하다
불행이라도 충분하므로
혹한의 겨울이 찾아오는 동안
많은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죽음이란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지만 살아갈수록 함께 살아가는 것
더러운 물에 깨끗한 물 붓지 못하고
깨끗한 물에 더러운 물을 부으며 살아왔지만
나의 눈물은 뜨거운 바퀴가 되어
차가운 겨울 거리를 굴러다닌다
남의 불행에서 위로를 받았던 나의 불행이
이제 남의 불행에게 위로가 되는 시간
밤늦게 시간이 가득 든 검은 가방을 들고
종착역에 내려도
아무데도 전화할 데가 없다
명동성당
바보가 성자가 되는 곳
성자가 바보가 되는 곳
돌멩이도 촛불이 되는 곳
촛불이 다시 빵이 되는 곳
홀연히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곳
돌아왔다가 고요히 다시 떠날 수 있는 곳
죽은 꽃의 시체가 열매 맺는 곳
죽은 꽃의 향기가 가장 멀리 향기로운 곳
서울은 휴지와 같고
이 시대에 이미 계절은 없어
나 죽기 전에 먼저 죽었으나
하얀 눈길을 낙타 타고 오는 사나이
명동성당이 된 그 사나이를 따라
나 살기 전에 먼저 살았으나
어머니를 잃은 어머니가 찾아오는 곳
아버지를 잃은 아버지가 찾아와 무릎 꿇는 곳
종을 잃은 종소리가 영원히
울려퍼지는 곳
휴대폰의 죽음
휴대폰의 죽음을 목격한 적이 있다
영등포구청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전동차가 역 구내로 막 들어오는 순간
휴대폰 하나가 갑자기 선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전동차를 기다리며 바로 내 앞에서
젊은 여자와 통화하던 바로 그 휴대폰이었다
승객들은 비명을 질렀다
전동차는 급정거했으나 그대로 휴대폰 위로 달려나갔다
한동안 전동차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역무원들이 황급히 달려오고
휴대폰의 시체는 들것에 실려나갔다
한없이 비루해지면 누구의 얼굴이 보이는 것일까
지금 용서하고 지금 사랑하지 못하는 것일까
선로에 핏자국이 남아 있었으나
전동차는 다시 승객들을 태우고 비틀비틀 떠나갔다
다시 전원의 붉은 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며
휴대폰은 자살한 이들과 함께
천국의 저녁 식탁 위에 놓여 있다
풀잎에게
늙은 아버지의 몸을 씻겨드리는 일은
내 시체를 씻기는 일이다
하루종일 밖에 나가 울고 돌아와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공중목욕탕에 가서
정성껏 씻겨드리는 일은
내 시체의 눈물을 씻기는 일이다
아버지의 몸에 남은 물기를 다 닦아드리고
팬티를 갈아입혀드린 뒤
공손히 손톱을 깎아드리는 일도
내 시체에서 자란 눈물의 손톱을 깎는 일이다
나는 오늘도 하루종일 울고 돌아와
늙은 아버지의 몸을 씻겨드린다
밤의 벌레 뒤를 따라가
풀잎 위에 등불을 달고
내 시체를 눕힌다
수덕여관
일생에 한번쯤
수덕사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고
평생 오지 않았던 잠을 자보아라
열매 맺지 않는 꽃이 붉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비록 이튿날 아침 깨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일생에 하룻밤쯤
수덕여관 산당화에 기대어 잠을 자보아라
열매 맺지 않는 꽃이 맺은 열매에
다시 붉은 꽃이 피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평생 오지 않는 잠이 있다면
수덕여관 샘물을 한 바가지 들이켜보아라
물 위에 코끼리를 타고
모든 쓸쓸한 사랑이 지나가버린다
웃음
개심사에 다녀온 뒤
아파트 베란다에 풍경을 달아놓고
풍경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린다
아무리 기다려도 들리지 않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들리지 않는다
하루는 손으로 툭 쳐서
개심사 해우소 가을 지붕 위에 떨어지는
노란 은행잎 소리 같은
풍경소리를 내어보고
그냥 혼자 웃는다
밤의 비닐하우스
밤기차를 타고
밤을 지날 때
환하게 불을 밝힌 비닐하우스는
밤의 갠지스 강을 건너는
작은 나룻배
물결 따라 어디론가 흘러가다가
잃은 길을
또 잃을 때
흔들리는 강물에 띄우는
꽃등잔불
이중섭의 방
제주도 서귀포
이중섭 가족 네 식구가
바닷게들과 가난하게 살았던
초가 문간방
솥단지 하나 달랑 입구에 놓여 있는
1.4평짜리 방 한 칸
그 좁은 방 안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한라산이 방 안에 저 혼자 앉아
어깨에 쌓인 흰 눈을
털고 있었다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낙산사에 버리고 온 나를 찾아가지 못한다
의상대 붉은 기둥에 기대 울다가
비틀비틀 푸른 수평선 위로 걸어가던 나를
슬그머니 담배꽁초처럼 버리고 온 뒤
아직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
이제는 봄이 와도 내 손에 풀들이 자라지 않아
머리에 새들도 집을 짓지 않아
그 누구에게도 온전한 기쁨을 드리지 못하고
나를 기다리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을 이미 잊은 지 오래
동해에서는 물고기들끼리 서로 부딪치지 않고
별들도 떼지어 움직이면서 서로 부딪치지 않는데
나는 나를 만나기만 하면 서로 부딪쳐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낙산사 종소리도 듣지 못한다
물의 꽃
강물 위에 퍼붓는 소나기가
물의 꽃이라면
절벽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물의 꽃잎이라면
엄마처럼 섬기슭을 쓰다듬는
하얀 파도의 물줄기가
물의 백합이라면
저 잔잔한 호수의 물결이
물의 장마라면
저 거리의 분수가 물의 벚꽃이라면
그래도 낙화할 때를 아는
모든 인간의 눈물이
물의 꽃이라면
파도
마른 멸치처럼 구부러진
구순의 아버지
팔순의 어머니하고
멸치를 다듬는다
떨리는 손으로
파도에 넘어지면서
멸치 대가리는 떼라는데
왜 자꾸 안 떼느냐며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느냐고
구박을 받으면서
파도에 자꾸 넘어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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